▲오양심 칼럼니스트

재일한국인은 일제 식민지 때 일본으로 건너가 거주하게 된 한국인이다. 일본에 정착하여 일본 국적을 취득하거나, 한국 국적을 유지한 채 살고 있는, 재일동포(재일교포)를 말한다. 문제는 재일한국인이 차별과 고통과 투쟁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한글과 한국어의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10회 부산국제화제에서 영화로 상영되었던, 202035, KBS 1TV에서 다큐멘터리로 방영될 우리들의 학교를 지키는 일은, 남한과 북한의 문제가 아닌, 남북분단의 비극이 풀어야 할 피맺힌 절규이다.

재일동포의 시작은, 조선의 국명인 대한제국 때, 일본으로 유학한 학생들로부터 시작된다. 경상도 출신과 제주도 출신이 열악한 환경을 벗어나려고 일본으로 다수 건너간 것이다. 자유도항제가 실시된 후에는 한국인이 폭발적으로 일본으로 일하러 갔다.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직항 배편이 개통된 후에는, 재일교포의 절반이상이 제주도 출신이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친 이후, 일본에 잔류한 재일교포들은 각종 사회적 차별에 시달렸다. 남북 간의 반목이 민단과 조총련으로 분열되었다. 그동안 두 단체가 화해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국의 남북분단 체제에서 좌절로 돌아갔다. 한국의 군사독재시기에 재일교포의 피해가 극심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순간 억울하게 붙잡혀서 고문을 당하다 가 죽은 사람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한국어를 제대로 못 하니까 외국인 취급받기가 일쑤였다.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에서는 재일교포 출신 귀환자들을 '재포' 또는 '째포'라고 낮춰서 불렀다.

그 당시 한국어 강습소는 일본 땅 여기저기에서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생겨났다. 일제 식민지 때 빼앗겼던 말과 글을 되찾고자 해서였다. 어깨 좀 펴고 살고자 해서, 고국에 돌아가 서 생활하려면 말과 글을 알아야 해서였다. 재일본조선인연맹은 민족교육사업에 주력하면서 한국어 강습소들을 학교형태로 만들었다. “돈 있는 자는 돈을, (노동력)이 있는 자는 힘을, 지식이 있는 자는 지식으로라는 표어를 걸어놓고 행동으로 실천했다. 6만여 조선의 아들딸들은(당시 동포들의 전체 숫자는 60여만) 600여 개의 판자집 학교에서 눈치 볼 것 없이, 한국어를 교학상장(敎學相長)했다. 하지만 미군정과 일본 당국이 조선학교 폐쇄령을 내리면서, 거의 모든 학교가 문을 닫는 우여곡절을 겼었다.

조련(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이 결성된 것은 그때였다. ‘한국어 강습소조선학교로 불렀다. 조총련계열의 조선인만 연합회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국적의 23세도 가입을 했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조선학교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북한 정부에서는 교육원조비와 장학금을 송금했다. 23000여 명이던 학생 수는 46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학교의 신증축 등 시설 확장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대학도 설립되어 일본 땅 내에 독자적이며 완성된 교육체계를 만들었다. 인재육성은 민족교육으로 자리매김 되어갔다. 반면에 대한민국 정부는 조총련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조선학교 자체가 재일한국인들의 열렬한 한국어 교육투쟁의 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에 기울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일본 정부에 조선학교문을 닫아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지금 재일한국인은 민단과 조총련으로 분열되어 있고, 민단 소속의 한국학교는 동경(도쿄)한국학교, 교토국제학교, 오사카 금강학교, 건국한국학교 단 4곳뿐이다. 조총련 소속의 조선학교는 68곳으로 학생 수는 육천 명이다. 조선학교 학생들의 절반 이상은 한국국적을 갖고 있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도쿄(東京)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자 가운데, 학령인구(6~21)15천 여 명에 달하지만, 한국학교는 정원 1400명의 동경한국학교 한 곳밖에 없다.

우리들의 학교는 재일조선인 고유찬감독이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영화이다. 일본에 있는 조선학교의 100년 차별과 저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학교를 '우리학교'라고 부르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은, 아이들의 꿈을 키우기 위해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민족교육 사업을 펼쳐왔다. 해방 후 전국 각지에 우리말과 우리글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는 조선인학교를 세웠고, '조선인학교 폐쇄령'에 맞서 싸웠고, 집요한 차별정책에 대항을 했다. 16세 소년 김태일 등이 일본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희생을 치르며 '우리학교'를 지켜왔다.

지금 일본에서는 '우리학교'가 혹독한 수난을 겪고 있다. 2010년부터 일본정부는 고교무상화제도로부터 조선학교를 배제했다. 지방자치단체는 보조금을 중단했다. '우리학교'는 힘을 모아 재판 투쟁을 시작했다. 우리는 역사적 자료와 증언을 통해 '우리학교'가 차별과 싸워온 진실을 알아야 한다. 북한은 빨갱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분단역사의 70년 비극이며, 재일한국인의 피맺힌 절규를 우리들의 학교에서 보고 들어야 한다. 비록 다큐멘터리이지만 더 넓은 세상과 뼈아픈 상식을 경험해야 한다. 한국학교와 조선학교가 다름을 인정하고 같음을 지향하여,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하여 우리 모두 시급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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