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교과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인 인물로 소개
• 성공 사업가에서 시장 거쳐 3선의 美연방하원의원
• 美전직연방의원협회(FMC) 내 ‘한국연구그룹’도 창설
• ‘최초’ 한국계 미 연방의원 등 정치 이력마다 ‘최초’

▲ 지난 1일 김창준 전 美연방하원의원이 서울 여의도 김창준한미연구원 집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 지난 1일 김창준 전 美연방하원의원이 서울 여의도 김창준한미연구원 집무실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제이 킴’(Jay Kim).

이는 미국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인 인물로 소개된 김창준 전(前) 미하원의원 겸 김창준한미연구원 이사장의 약식 이름이다.

약관의 나이를 넘은 20대에 그는 ‘큰 뜻’을 펼치겠다는 일념으로 무조건 미국행을 감행했다. 청년 김창준에게 큰 뜻의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저 더 큰 곳에서 무언가 해보겠다는 “두둑한 배짱” 하나로 사서 고생하는 인생의 길을 택했다.

▲ 주위에서 소년 시절의 김창준(왼쪽)은 재기가 있어보이는 총명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주위에서 소년 시절의 김창준(왼쪽)은 재기가 있어보이는 총명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심상사성’(心想事成)이라는 말이 있다.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뜻이다. 바로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을 두고 하는 말에 해당한다. 그가 ‘큰 뜻’을 간절히 원했더니 우주의 기운은 그가 원하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그의 정치 이력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기업을 경영하다 우연히 캘리포니아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후 바로 시장으로 당선됐다. 그 후 1992년 곧바로 미 하원에 당선돼 미 의회에 입성한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이 됐다. 또한 국외에서 정치적 공직에 당선된 최초의 한국인이며, 미 연방 의회에 당선된 최초의 아시아계 이민자이기도 했다.

▲ 사업가 김창준은 1990년 캘리포니아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이듬해 시장을 거쳐 바로 미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사업가 김창준은 1990년 캘리포니아 다이아몬드바 시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이듬해 시장을 거쳐 바로 미 연방하원의원으로 당선되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기업계와 정계 활동을 바탕으로 김 전 하원의원은 자신의 정치적·경제적 경험을 살려 우리나라의 정치지도자 양성을 위한 활동에 팔을 걷어부쳤다. 또한 3선의 미연방하원의원을 지내면서 쌓아온 경륜과 인맥을 이용해 한국과 미국의 민간 교류에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의 공로를 인정한 미 의회는 지난 6월 14일, 한미 민간 교류에 큰 업적을 세운 김 전 의원에게 미 의회 의사록(Congressional Record Vol. 169, No. 104)을 수여했다. 이것은 미국 연방하원에서 중요한 공적을 올린 인물을 기리기 위해 주는 영예의 상에 해당하며 연방 도서관에 영구 기록된다.

▲ 김창준 이사장과 부인 제니퍼 안 여사(부이사장)가 미 의회의 한미 민간 교류 공로에 대한 기록 인증 액자를 전달받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 이사장과 부인 제니퍼 안 여사(부이사장)가 미 의회의 한미 민간 교류 공로에 대한 기록 인증 액자를 전달받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파이낸스뉴스>는 한·미 민간 교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김창준 전 미연방하원의원을 지난 1일 서울 여의도 김창준한미연구원에서 만나 인터뷰를 가졌다.

◆ 다음은 김 전 美의원과의 일문일답.

ㅣ 미국으로 가게 된 동기와 초창기 미국 생활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던 20대 때, 사법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절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더 큰 곳에서 뜻을 펼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도전하겠다는 용기를 내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의 생활 초기는 정말 고생 그 자체였다. 초반에 캘리포니아에 살 때 단칸방에 살면서 낮에는 대학(Chaffey College)에 다니고 밤에는 식당에서 밤늦도록 일을 했다. 영어는 서툰 데다 모든 게 낯선 이역만리에서 고독과 향수병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 김창준 전 미연방하원의원은 열정이 넘친다. 그 열정이 김 전 의원의 시계를 멈추게라도 하듯이 언제나 젊음의 기개를 유지하게 한다.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 김창준 전 미연방하원의원은 열정이 넘친다. 그 열정이 김 전 의원의 시계를 멈추게라도 하듯이 언제나 젊음의 기개를 유지하게 한다.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지금 기억으로는 거의 매일 저녁, 조국에 두고 온 부모님과 친구들을 생각하며 미국행을 후회한 적도 많았다. 섣불리 ‘괜히 왔구나’ 하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젊음의 패기로 버텨나가던 중에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공과대학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그 때쯤 만난 온타리오시의 <더 데일리 리포트>(The Daily Report) 라는 지역신문의 사장이 내게 아침에는 학교에 가고 저녁에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정말 천우신조 같은 기회로 큰 행운을 얻었다. 그래서 배달 책임자 일을 맡아 열심히 일해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조금씩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ㅣ사업가로 시작했다가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

▲ 대학 졸업 후 창립한 토목설계 회사 '제이킴 엔지니어링'은 성장을 거듭해 130명의 직원을 둔 미국 상위 500위권 중견기업이 되었다. 공사현장을 점검하는 CEO 김창준(가운데).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대학 졸업 후 창립한 토목설계 회사 '제이킴 엔지니어링'은 성장을 거듭해 130명의 직원을 둔 미국 상위 500위권 중견기업이 되었다. 공사현장을 점검하는 CEO 김창준(가운데).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대학을 졸업한 후 토목기사로 경험을 쌓은 뒤 39살에 ‘제이킴엔지니어링’(Jay Kim Engineering) 이라는 설계회사를 세웠다. 그때부터 삶이 여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회사가 하루가 다르게 쾌속 성장하면서 사회활동도 많아지고 바빠졌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폭넓게 활동하다보니 엔지니어링 계통에서는 ‘유명인사’처럼 돼 버렸다. 13년 동안 건설 분야 업종에 종사하면서 이곳저곳 강연을 했던 덕택이었다. 이 무렵, 장차 무언가를 더 일궈 나가기 위해서는 ‘경험’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 서울 여의도 김창준한미연구원 집무실에서 진행된 본지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의 모습.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 서울 여의도 김창준한미연구원 집무실에서 진행된 본지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의 모습.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처음에는 정치에 대한 꿈이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추상적인 착상일 뿐이었다. 늘 마음속에 무언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다보니 실행에 옮겨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그래서 내가 살던 시(市)에서 도시계획 자문위원장으로 봉사할 기회를 얻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당시 시장이 이 분야에서 이름이 알려진 사업가였던 나를 알아보고 실력을 인정하면서 시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때 처음으로 지방 정치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도시계획 자문을 하면서 4년을 일했다. 그 기간 동안 다이아몬드 바에 땅을 사고 집을 짓고 살게 되었던 것이 내 정치 인생의 초석이 될 줄은 몰랐다. 지나고 보니 다이아몬드 바 시의원, 시장, 연방의원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발돋움의 ‘결정적인 계기’(defining moment)가 된 셈이다.

l 정치에 입문하게 된 후 초선도 힘든데 무려 3선을 하게 된 원동력은.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다이아몬드바 시장에서 주(州)의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연방의원으로 직행해 다른 동료의원들과는 차별화가 됐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다이아몬드바 시장에서 주(州)의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연방의원으로 직행해 다른 동료의원들과는 차별화가 됐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다이아몬드바 시장에서 곧바로 연방의원으로 당선되어 의회에 들어갔다. 그 때, 연방의원같은 경우는 초선의원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이미 주(州)의원 생활을 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연방의회의 각종 절차는 주의회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 주의원 출신들이 연방의원으로서 일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역의 시장직만을 수행해 주의회의 경험이 없었다. 그러니 초반에는 다른 동료 의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심지어 의회 전문용어에도 익숙지 않았다. 200년 의회 역사를 통해 내려오는 절차에 따라 사용되는 용어도 일반적인 말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의원들보다 더 노력하고, 배우며 열정을 쏟았다.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항상 참모진과 '소통'을 통한 '화합'으로 남다른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항상 참모진과 '소통'을 통한 '화합'으로 남다른 리더십을 발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그러자 임기를 더해가면서 의회 내에 가장 예산이 많다는 공공사업·교통분과 위원회에 소속 돼 활동을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위원회를 택해 활동하면서 우리 지역구를 위한 의정을 활발하게 펼쳐나갔다.

법안을 내기 위해 바삐 뛰어다니면서 큰 성취감을 얻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의미있는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권자들에게 다짐한 공약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것이 연방의원 3선까지 지탱해준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 본지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는 '심상사성’(心想事成)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 본지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생각하고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진다’‘는 '심상사성’(心想事成)을 강조하고 있다.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l 김창준재단 소개와 한미 민간외교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 배경은.

▶ 한국으로 돌아와 엄청나게 발전한 우리나라의 경제 상황과 넓은 저변의 인재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라는 한계만 잘 극복한다면 훨씬 더 눈부신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2012년에 30년간 미국에서의 기업경영과 20여년 정치리더십 경륜을 바탕으로 <김창준아카데미>를 창설했다. 이를 통해 한미 민간외교 활성화와 대한민국의 미래 정치·경제 지도자 육성에 앞장섰다.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3선을 역임 후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며 새로운 도전의 인생 여정을 시작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3선을 역임 후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며 새로운 도전의 인생 여정을 시작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이어 2017년에는 미국에서 시장과 연방국회의원 3선을 역임하며 구축해온 광범위한 글로벌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미 양국간 정·재계의 네트워크 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김창준한미연구원>을 창설했다.

이와 함께 美전직연방의원협회(FMC·Former Members of Congress)의 한국 의장을 맡아 보람을 갖고 활동하고 있다. 2017년 협회 내 ‘한국연구그룹’(Korea Study Group)을 독일, 일본, EU에 이어 네 번째로 설립하는 데에도 산파 역할을 했다.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광범위한 글로벌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미 양국간 정·재계의 네트워크 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사)김창준 한미연구원&아카데미'를 창설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광범위한 글로벌 인프라를 기반으로 한미 양국간 정·재계의 네트워크 가교 역할을 수행하는 '(사)김창준 한미연구원&아카데미'를 창설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FMC는 1983년에 美 국회의 승인으로 설립되었으며, 미국 헌법 시스템을 대표하는 전‧현직 상하원의원을 멤버로 하는 최고의 초당적 비영리 단체다.

FMC는 국회의원뿐 아니라 주지사, 외교관 등 미국 전역에 견고한 인프라를 형성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 기업들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고용하는 어떤 로펌보다도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조직이다.

또한 FMC는 의회 연구그룹을 통해 세계의 에너지 정책, 글로벌 무역 및 안보에 대한 민간 분야의 협력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면서 미의회와 연결도 강화하고 있다.

▲김창준 아카데미는 다양한 분야의 러더들이 참가해 '인사이트'를 공유하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김창준 아카데미는 다양한 분야의 러더들이 참가해 '인사이트'를 공유하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l 올해 美전직연방의원협회(FMC)가 두 차례 한국을 방문하게 된 의미는.

▶ 2019년부터 매년 <김창준한미연구원>이 초청하는 FMC 방한단은 국무총리, 국회의원, 지자체 등 정계와의 네트워킹을 강화해 왔다. 뿐만 아니라 포스코, 현대자동차, CJ, 삼성, LG, KCC, BBQ 등 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해 무역과 경제성장, 한반도 평화와 세계안보 등에 대해 다각도로 소통을 이어오고 있다.

▲ FMC 방문단이 국회외교통상위원회 초청 간담회 및 오찬에 참가하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파이낸스뉴스)
▲ FMC 방문단이 국회외교통상위원회 초청 간담회 및 오찬에 참가하여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파이낸스뉴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은 올해에는 5월과 6월 두 그룹으로 나누어 FMC의 전직 상하원의원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각각의 방한단은 10여일의 일정으로 한국에 머물며 다양한 일정을 소화했다.

매년 그렇듯, 방한단의 일정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은 단연코 6.25전쟁과 한미동맹의 역사와 관련된 DMZ, JSA 그리고 오산시 죽미령 평화공원 방문이라고 할 수 있다.

▲ FMC 방문단이 6.25전쟁과 한미동맹의 역사와 관련된 오산시 죽미령 평화공원을 찾아 안보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FMC 방문단이 6.25전쟁과 한미동맹의 역사와 관련된 오산시 죽미령 평화공원을 찾아 안보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오산시 죽미령 평화공원은 6.25 참전용사 출신인 찰스 랭글의원을 통해 의회 결의안을 통과시켜 미 의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바 있어 방한단에게는 더욱 의미가 있다. 뿐만 아니라, DMZ, JSA는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에 대해 가장 크게 실감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이 한국 의장을 맡고 있는 '美전직연방의원협회(FMC)' 회원들이 연례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판문점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이 한국 의장을 맡고 있는 '美전직연방의원협회(FMC)' 회원들이 연례적으로 한국을 방문해 판문점을 시찰하고 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이 땅의 평화수호를 위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이 있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상징의 장소이다. 또한 이곳에서 방한단들은 한미동맹이 갖는 의미와 필요성, 그리고 한미 안보강화에 대한 의지를 되새기고는 한다.

ㅣ내년이면 미국 대선이다. 정치가 출신으로서 판도를 어떻게 보는가.

▶ 2024년 대선을 앞두고 미국 정계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밀문서 불법 보관, 성추문 입막음 사건 등으로 여러 번 기소를 당하면서 민주당과 국민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판의 중심에 서 있다.

이 때문에 그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약하다고 다들 생각했다. 하지만 최근 모든 여론조사에서 경쟁후보인 론 드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보다 오히려 37% 포인트나 앞서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2016년 10월 '트럼프 대통령에 대비하라' 라는 책을 발행해 한국이 당시 미 행정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2016년 10월 '트럼프 대통령에 대비하라' 라는 책을 발행해 한국이 당시 미 행정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게다가 <뉴욕 타임즈> 여론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에서 맞붙는다면 바이든이 아주 근소한 차로 앞 설 정도다. 이 때문에 현재로서는 두 후보의 지지율이 막상막하라고 보고 있다.

캘리포니아주는 민주당, 텍사스주는 공화당이 강세이듯 다른 대부분의 주에서도 이미 표심은 크게 움직이지 않을 듯하다. 그래서 이번 선거에서도 펜실베니아·조지아·애리조나·미시간·위스콘신과 같이 표심이 유동적인 지역(스윙 스테이트)의 결과에 따라 대선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대선 당시, 유동적인 주에서도 두 후보 간 격차가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 점을 감안하면 트럼프가 2024년 대선에서 재선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도 매우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 송민수 본지 발행인 겸 대표이사(오른쪽)가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의 서울 여의도 집무실에서 '단독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 송민수 본지 발행인 겸 대표이사(오른쪽)가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의 서울 여의도 집무실에서 '단독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파이낸스뉴스 김민정 기자)

ㅣ 최근 캠프 데이비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 대해 코멘트 한다면.

▶ 최근 한미일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이미 뜨거운 반응이 나오고 있다. 쿼드(QUAD),오커스(AUKUS)에 준하는 안보협력체가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기대 섞인 평가도 있다. 특히, 이번 회담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반도체 및 배터리 공급망, 핵심광물, 바이오 기술 등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3국간 협력을 고도화 하겠다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이런 내용들이 중국을 겨냥한 것이다 보니,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 지난 6월 한국을 방문했던 FMC의 주요 인사들 소개자료.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지난 6월 한국을 방문했던 FMC의 주요 인사들 소개자료.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한미일 정상회담이 이루어지고 나서 중국외교부는 “중국에 대한 난폭한 내정간섭” 등 항의를 하면서 ‘국제관계의 기본 준칙을 심각하게 위반했다’고 비판했다. 그것은 이번 회담에서 ‘중국’을 명확하게 언급하면서 대만과 남중국해 분쟁에 대해서도 언급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편, 한 통계에 따르면 국내에서도 이번 회담에 대해서 ‘도움이 된다’(47.1%)와 ‘도움이 안된다’ (49.7%)로 긍정과 부정으로 나뉘고 있다. 하지만 격차는 2.8%포인트 차로 오차범위 안에서 의견이 팽팽하다.

이번 회담은 한미일 3국이 동아시아 지역의 안보와 국제정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국가들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번 회담은 3국이 ‘정상회담을 제도화’ 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l 김창준재단과 FMC가 앞으로 한·미 관계 증진에 어떤 역할을 할 건가.

▲본지와 '단독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본지와 '단독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는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한미연구원>과 FMC를 통한 민간외교는 2017년 내가 FMC 내에 한국 연구그룹을 출범시키는데 힘을 보태면서 그 활동이 본격화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FMC의 멤버로서 직접 FMC와 소통하여 구성하는 외교 창구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교류가 지속된다면 양국간의 인맥과 신뢰의 기반은 더욱 튼실하게 구축될 것이다. 이에 따른 기대효과와 사후관리 영역의 깊이는 국내 어떤 민간교류 활동보다도 더 클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동안 어려운 시기에 놓여있는 한국 기업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2017년부터 FMC의 대규모 연례행사(Statesmanship Awards Dinner Sponsorship)에 한국 기업인들이 함께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들의 미국 방문시 의회 연설을 진행하는 데 기여를 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김영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들의 미국 방문시 의회 연설을 진행하는 데 기여를 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여기에서 미국의 전·현직 국회의원들과 정부 관료들, 그리고 각국의 기업인들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아울러 FMC에 소속된 전직 국회의원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기업인들뿐만 아니라 국무총리, 외교부, 지자체 등과의 면담과 간담회 등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실사구시적 민간외교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쏟고 있다.

앞으로도 <김창준한미연구원>과 FMC가 한미 우호 협력의 기반 위에서 인적·경제적 교류가 더욱 활성화 되도록 선도적인 역할을 다할 것이다.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미국에서 (Washington Korean-American Forum)이라는 싱크탱크를 창립해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김창준 전 미하원의원은 미국에서 '워싱턴 한-미포럼'(Washington Korean-American Forum)이라는 싱크탱크를 창립해 회장으로 재임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사진=김창준한미연구원)

◆ 김창준 전 美연방하원의원(김창준한미연구원 이사장) 프로필

• 사단법인 김창준한미연구원 이사장 
• 사단법인 김창준아카데미 이사장 
1967 남가주 대학교 / 토목공학 학사
1969 남가주 대학교 / 환경공학 석사
1972 남가주 주립대학/ 행정 대학원
1993~1999 미국 캘리포니아 주 제 41지구 제103,104,105대 미 연방하원의원(3선)
1991~1992 미국 캘리포니아 주 다이아몬드 바 시장
1989~1991 미국 캘리포니아 주 다이아몬드 바 시의원
1994.08 <나는 보수다> 성문 출판사
1999.11 <국산정치와 미제정치> 도서출판 교문사
2010.03 <흔들어라, 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도서출판 옥당
2016.10 <트럼프 대통령에 대비하라> 라온북
2016.06~ 강원도 명예도지사
2015.04 미국 존스홉킨스대학교 한미연구소 USKI 이사
2013.05~2015.04 국민경제자문회의 공정경제분과 위원
2008~2013 대통령실 정책홍보자문위원

 

▶본 기사는 <사실너머 진실보도> 파이낸스뉴스 신문 24면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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